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종방 마을의 양잠 생산에 관한 연구: 곡성군, 담양군 종방 마을을 중심으로

The Characteristics of Jongbang-village sericulture at Jeollanam-do Province during Japanese Colonial Rule: Focused on Gokseong-gun & Damyang-gun Jongbang-village

Article information

Hum. Ecol. Res. 2018;56(4):407-416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18 August 23
doi : https://doi.org/10.6115/fer.2018.029
Dept of Anthropology, Chonnam National University
최승연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Corresponding Author: Seung Yeun Choi Department of Anthropology, Chonnam National University, 77, Yongbang-ro, Bukgu, Gwangju Tel: +82-62-530-2690 Fax: +82-62-530-2699 E-mail: chltmddus200@naver.com
Received 2018 May 22; Revised 2018 July 13; Accepted 2018 July 17.

Trans Abstract

This study investigated the characteristics and changes of Jeongbang-village silk culture Jeollanam-do Province during Japanese Colonial Rule with a focus in on Gokseong-gun & Damyang-gun Jeongbang-village. The results of the study are as follows. First, after Japanese occupation, it changed from a traditional silkworm species, the Joseon Silkworms and the mulberry tree to an improved Japanese species. Japan established a silk spinning mill called Jongyeon Textile factory in Gwangju and Jeongbang Village was formed in poor rural areas. Second, the way of village management consisted of buying a large number of land for mulberry plans and creating mulberry fields as a cheap way to utilize the labor force for women and men in rural areas. Third, since the end of the Japanese colonial era, mulberry fields in Jeongbang villages which the Japanese left, were sold at a cheap price to Koreans. After the Korean War, the Korean government’s efforts to modernize the silkworm industry resulted in a continuous plan to increase the number of silkworms. The impact of government policies has also increased the production of silkworms in these areas. However, since the early 1980s, Korean companies have been affected by Japanese economic policies and dumping by China that has resulted in in a sharp decline in their production. In the case of Gokseong-gun and Damyang, the production of silk products was halted and switched to other crops in the early 1990s when the farming industry began to decline.

서론

한국은 상고시대부터 양잠과 견직물을 생산했을 만큼 전통 시기부터 견직물 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지역이 갖는 고유한 생태, 역사, 사회문화적 전통에 의해 지역별 다양성과 역동성을 지닌 직물 문화가 존재했었다. 일제 강점기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면서 이와 같은 지역들의 고유한 전통 직물 문화는 강제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이것은 해방 이후 각 지역의 직물 생산 문화에까지도 영향을 주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면서 추진했던 여러 가지 정책들 가운데 농촌지역의 쌀, 면화와 양잠 증산 계획들이 있었고 이와 같은 식민지 정책들은 한국 전체에 동일하게 적용된 것이 아닌 자연적, 지리적 특성이 다른 도(道)의 행정단위들을 중심으로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연구는 일제 강점기 동안 전라남도 지역의 섬유 자원 수탈 대상으로서 면직물 이외에도 견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식민 정책에 의해 7개의 양잠 재배 마을인 종방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들 종방 마을은 근대 시기 전라남도 지방의 견직물 문화의 특징을 제시해주고 있는 지역들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있다. 또한 이들 종방 마을들은 전라남도 지역이 일제 강점기의 식민 정책에 의해 견직물 생산 문화에 있어 어떤 특징과 변화를 경험했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연구 대상 지역들이다.

전라남도 7개 종방 마을들은 일본 식민지 지배에 의해 급격한 영향을 받았던 근대 전라남도 견직물 문화의 특징과 변화의 일면을 보여주면서도 견 문화의 지역적 다양성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연구의 중요성이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전라남도의 종방 마을들은 전라남도 지방의 견직물 문화의 특징과 변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이와 관련된 체계적인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점에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본 연구는 전라남도 7개 종방 마을들 중 일차적으로 2개 마을(곡성군과 담양군)을 중심으로 일본 식민지 정책 전, 후의 견직물 문화의 특징과 변화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일제 강점기 한국에 진행되었던 양잠 정책이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전라남도 2개의 종방 마을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그로 인한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의 결과는 추후 전라남도의 다른 5개 종방 마을들에 관한 후속 연구의 진행 및 비교 연구 자료로서도 그 의미가 있다.

이론적 배경

견직물에 관한 기존 연구는 기본적으로 전통 직물에 관한 연구로서 면, 마와 같은 다른 섬유 종류 그리고 다양한 직물 조직과 함께 포괄되어 일반적인 출토 직물 연구로서 진행되어져 왔다. 그 동안 한국 전통 직물 연구들에서는 출토되는 섬유의 종류에서 견섬유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을 만큼(Choi, 2011) 견직물의 중요성은 매우 크게 다루어져왔다. 전통 견직물에 관한 선행 연구들은 크게 견직물이라는 독립적인 주제가 아닌 다른 섬유류 및 조직류와 통합되어 진행된 연구와 견직물만을 독립적인 주제로 다루고 있는 연구들로 구분할 수 있다. 다른 섬유류 및 조직류와 통합되어 진행된 견직물 연구의 경향성은 먼저 문헌 연구와 유물 연구로 구분할 수 있으며 소수의 문헌 연구에 비해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하는 실증적 연구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해왔다. 즉 전통 시기 한국 견직물의 기술 및 역사적 특징을 총체적으로 규명한 연구(Min, 2000; Sim, 2002)를 주축으로 유물에 관한 과학적인 분석 연구(Jang & Kwon, 2000; Kwon, Jang & Yi, 2003; Kwon et al., 2000)가 가장 많이 진행되어 왔다.

근대 시기 직물 연구는 의류학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문, 사회 분야의 영역에서도 다루어져왔다. 특히 인문, 사회 분야의 연구를 통해 중앙이 아닌 지역의 직물 연구들이 다루어지면서 견직물에 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그러나 근대 시기 견직물에 관한 연구들은 20세기 전반기 한국 출토직물의 특징 안에서 파악되는 견직물의 유형적인 특징에 관한 연구(Jang & Kwon, 1993)와 일제 강점기 한국 양잠업에 관해서는 사회학과 역사학적 연구들(Jung, 1986; Kim, 1989) 그리고 경제학 분야의 연구(Kwon, 1989)를 통해 이 시기 견직물 문화의 왜곡적인 변화 과정에 관한 연구들이 있었다. 지리학 분야에서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 과정을 통해 지방의 전통 직물 수공업의 생산유통체계의 변화 및 경영특성 그리고 산지 내 사회적 분업과 지역 분화의 실태를 지역적으로 살펴본 연구들(Cho, 1992; Joung, 1990)이 있었다.

살펴 본 바와 같이 개항기 이후 근대 직물 문화에 관해 학문 분야별로 진행된 선행 연구들은 의류학, 민속학, 역사학, 사회학, 지리학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현재까지의 선행 연구들은 경제학, 사학,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일제 강점기 섬유 산업 전반에 대한 정책과 변화 양상들을 다룬 연구들이었으며 물론 이들 연구들에서는 한국 전체 지역에 대한 식민지 섬유 산업의 영향들을 통계자료와 문헌자료들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식민지 섬유 정책이 다르게 적용되었던 도 단위의 지역들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근거로 해당 지역들이 경험한 일제 강점기 식민지 섬유 산업의 과정과 해방 이후의 변화 양상들에 관해 지역별로 전개되었던 식민지 양잠 정책과 그 영향의 결과들이 지역별로 어떻게 다르게 전개되었는가에 관해 해당 지역들에 대한 직접적인 현지조사를 중심으로 지역별 상황을 조사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연구방법 및 절차

1. 연구방법

본 연구방법은 크게 문헌연구와 현지조사 연구의 2가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문헌연구는 곡성군과 담양군의 종방 마을의 역사와 직물 문화와 관련된 문헌자료가 조사되었다. 문헌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현지조사 연구는 2회(1차: 2015년 12월, 2차: 2017년 12월과 1월)에 걸쳐 두 지역에서 관공서의 도움으로 고령자들을 중심으로 면담자를 선별하였다(Table 4). 선별된 22명의 일제 강점기 견직물 생산에 관한 기억과 경험을 지닌 현재 거주중인 주민들에 대한 면담 조사 및 채록의 방식이 이루어졌다.

Key Informants List

곡성군의 행정구역은 곡성읍·오곡면·삼기면·석곡면·목사동면·죽곡면·고달면·옥과면·입면·겸면·오산면 등 1개읍 10개면 125개 동리가(Gokseong-gun Institute, 1982) 있는데 이 가운데 종방 마을인 목사동면과 입면 2개 마을을 선정하였으며 이 지역 면사무소를 통해 마을 고령자들을 소개 받았다. 담양군의 행정구역은 담양읍·봉산면·고서면·남면·창평면·대덕면·무정면·금성면·용면·월산면·수북면·대전면 등 1개읍 11개면 138개 동리(http://www.damyang.go.kr/index.damyang)가 있는데 이 가운데 종방 마을이 있었던 내동, 입면, 용면, 수북면, 대전면을 선정하여 면사무소를 통해 마을 고령자들을 소개 받았다.

2. 연구대상

일제 강점기에 종방 마을들(Table 1)이 형성되었으며 이 연구에서는 7개 종방 마을들 중 일차적으로 곡성군과 담양군 종방 마을(Figure 1)에 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Jeongbang Village in South Jeolla Province

Figure 1.

Map of south Jeolla province

연구 결과 및 논의

1. 곡성군과 담양군 종방 마을의 양잠생산

① 곡성군 종방 마을

곡성군에서 조선시대 최초로 양잠 시작된 곳은 석곡면, 삼기면, 옥과면이며 일제 강점기에는 목사동면과 입면 마을에 잠실단지를 조성하여 상전면적 375町步(정보)까지 조성되었다고 한다(Gokseong-gun Institute, 1982).

곡성군에서 잠실 단지가 조성되었던 목사동면과 입면 마을에 관해 자세히 살펴보면 목사동면은 동쪽으로는 죽곡면, 북쪽으로 석곡면, 남쪽으로 순천시 주암면, 서쪽으로 보성강을 경계로 석곡면과 순천시 주암면에 인접하여 있다. 목사동면 중 대곡리(理)가 과거 종방마을이 형성되었던 마을로서 마을 앞으로 목사동천이 흐르고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 평야지역이다(http://www.gokseong.go.kr). 이와 같은 물과 넓은 평야가 있다는 조건이 일본이 이 지역을 종방 마을로 선정한 중요한 입지 조건이 되었다. 곡성군 입면은 섬진강 인근에 홍수 범람을 막기 위해 자연제방을 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목사동면이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있었던 마을이라고 한다면 입면은 일제강점기 양잠단지가 조성되면서 양잠과 관련된 사람들이 이주,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특히 입면에는 1932년 순천시 출신 강릉 유씨 유수종이라고 하는 남성이 관리 책임자로 부임(Gokseong-gun Ip-myeon Institute, 2007)하면서 상전 개발이 활발해지고 가구 수도 늘어났다.

곡성군 목사동면과 입면 종방 마을들에는 현재까지도 일제 강점기부터 전쟁 이후 시기까지 견직물 생산과 관련된 경험을 가진 노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입면 종방마을 이장님에 따르면 종방 마을은 마을의 역사가 다른 마을에 비해 깊지가 않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일제 강점기 종연방적 회사가 종방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객지에 있는 노동자들이 종방 마을에 들어와 삶의 터전을 잡으면서 마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비교하면 종방 마을 인근의 내동마을의 경우에는 집성촌 등으로 같은 씨족집단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의 역사가 매우 깊은 곳이다.

② 담양군 종방 마을

담양군 역시 일제 강점기 종연 방직 주식회사에 공급할 누에고치를 위해 종방 마을들이 조성되었다. 현재에도 담양군에는 종방 마을이라는 이름이 존재하고 있는데 일제 강점기 당시 종방 마을에는 종연방직을 세운 일본인과 이 공장에 다녔던 한국인 마을 주민들이 거주하였지만 현재에는 일본인들은 없다. 용면과 대전면 일대에 넓은 상전(桑田)이 조성되었으며 이들 종방 마을들에는 현재까지도 일제 강점기부터 전쟁 이후 시기까지 견직물 생산과 관련된 경험을 가진 노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2. 일제 강점기 이전 곡성군과 담양군 종방 마을의 견직물 생산

1) 조선누에와 구지뽕 나무

김**(98세, 곡성군 목사동면)는 “뽕잎은 꾸지뽕이라고 그걸 밭에다 숭거가꼬 따서 누에한데 줘”라고 했고 정**(81세, 담양군 수북면)는 시집오기 전에는 친정인 담양군 대전면에서 어릴 때 산으로 산뽕을 따러 다녔다고 했다. 박*(87세, 담양군 용면)은 집방 한 켠 에 누에고치를 키우면서 산 뽕을 따다 먹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곡성군과 담양군에서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개별 가정마다 방에 누에고치를 키우면서 산이나 마을에 자라고 있는 전통 뽕나무인 구지뽕을 따다가 누에고치를 키웠다고 했다. 김**(92세, 곡성군 목사동면)의 집에는 과거 집에서 누에를 기를 때 누에를 올려두었던 “치아판”(Figure 2)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Figure 2.

“Chiapan” in Moksadong-myeon, Gokseong-gun.

2) 견 제사

김**(98세, 곡성군 목사동면)는 일제 강점기 이전 마을에서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물레로 감아올리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었다. “요만 요만한 솥단지들 걸어 넣고 물을 넣고 누에 꼬치를 넣고 요거 돌것 돌림시로 요러고 하믄은 실이 나와 실이 나오믄 그것을 돌것에다 돌려가꼬 인제 날아가꼬 베를 내 서 감아 가꼬는 인자 베틀에다 내놓고 짜 요러고요러고 짜”.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정마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었음을 알 수 있다. 견의 제사과정에서 사용하는 별도의 솥이 있었고 면화에서 사용하는 물레를 견의 제사과정에도 함께 사용했다고 하였다.

3) 견 제직

마을에서는 거의 대부분 전통적인 한국의 재래베틀인(腰機) “조선베틀”을 사용했으며 견의 제사는 면이나 삼베와 같은 다른 섬유 종류보다 간단하였다. 그러나 직조는 견사가 가늘고 직조하는데 정교함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루에 1필(22자)를 직조하는 것은 힘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마을 여성들 가운데 솜씨가 좋은 여성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4) 견 유통

장**(91세, 곡성군 목사동면)은 “장에. 장에 시장이나 장에 베장시 있어 사로 다닌 사람 있어 5일 장날에 팔아. 석곡장야, 곡성장 저위에가 있고, 석곡장, 베 가격이 정해진 것이 아니여. 물건 좋은대로 팔아. 베가 좋으면 많이 받고 베가 물면 적게 받고 그래. 많이 나가꼬 해입고 남으믄 팔제 옷 해 입고 식구들 옷 해 입고 남으믄 팔고 안 남으면 안 팔고 그랬제”라고 하고 임**(91세, 담양군 수북면)는 견사를 대치면에 있는 한재 5일장으로 팔러가고 엄마가 한재 5일장에서 비단천(견직물)을 사와서 옷을 만들어 주셨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이들 종방 마을들이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누에고치를 길러 견 제사를 해서 직조까지 마친 견직물은 대부분의 가정에서 명절과 결혼식 등 특별한 날을 위한 의복 혹은 시부모님의 의복을 만드는 경우에만 아껴두고 사용하였다. 이외에 직조한 견직물은 현재에도 곡성군 장터로 이용되고 있는 석곡 5일장(Figure 3)의 베전 그리고 담양군의 경우에도 한재 5일장이 가장 큰 시장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누에고치 혹은 견사, 견직물을 베전에 가지고 가서 자유롭게 판매하였음을 알 수 있다.

Figure 3.

Seokgok-market in Gokseong-gun.

3. 일제 강점기 양잠 정책과 전라남도 종방 마을의 형성

1) 종연방직과 전라남도 종방 마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여러 가지 식민 정책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쌀, 면화, 그리고 양잠 증산 계획이다. 면과 견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조직적으로 이뤄졌으며 이것은 한국 농촌 지역 농민들을 강제로 식민지 정책에 동원하는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이전 전통 잠사업에서는 가내수공업적인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잠, 제사, 직조, 유통이라는 직물 생산 과정의 체계가 유지되고 있었지만 일본은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이런 결합적 과정을 해체시키고 동시에 그 기초 위에서 각각의 부분을 개량이라는 이름으로 재편(Jung, 1986)하였다. 그 결과 한국 농촌 전통 양잠업은 급격한 변화와 함께 기형적인 생산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변화된 양잠업의 특징을 알아보기 위해 일제 강점기의 섬유 관련 식민 정책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섬유 자원인 면화와 양잠의 정책 추진 방향은 유사하였는데 첫째 전통적인 한국 잠종(蠶種)을 일본의 개량 잠종으로 통일하는 것으로 한국 농촌 지역 전체에 이와 같은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둘째 면화와 양잠 섬유 원료를 한국 농촌에서 수탈하여 일본으로 반출하는 과정, 셋째, 일본 대자본의 섬유 공업 회사를 한국의 각 지역에 진출하여 이 회사들에 원료를 직접 공급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Bae, 1993).

일본은 장기적이고 체계적으로 이 3가지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국의 각 지역 농촌의 상황별로 정책을 달리 적용하였는데 이 정책의 큰 2가지 유형은 “자작양잠경영”과 “소작양잠경영” 방식이었다. 자작양잠경영은 누에고치 생산과정에서 농민이 토지와 자본력을 지닌 지주층의 지배를 받는 생산 형태이다. 소작양잠경영은 1930년대 이후 한국에 진출했던 일본의 대자본 재벌기업들이 해당 지역에 공장을 설립하고 직접 양잠 생산, 유통(공동판매제)에 참여하는 생산 방식이다. 소작양잠경영 방식에 의한 독점제사 자본 진출 정책이 적용된 지역은 대구, 경성, 전주, 대전, 광주, 전주 지역들(Kim, 1989)이었다.

특히 자작양잠경영보다는 일본의 독점제사자본이 진출하는 소작양잠경영방식이 적용된 지역들은 토지를 많이 소유한 한국인 대지주의 수가 적고 뽕나무를 재배할 논이나 밭이 없는 가난한 농촌지역들이 주 대상이 되었고 전라남도 농촌 지역이 이 유형에 해당되었다. 자작양잠경영방식이 한국인 지주계층을 일본인들이 설득, 회유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방식인 반면에 소작양잠경영방식은 넓은 평야지역을 가진 가난한 농촌지역을 대상으로 군과 면 단위의 행정력을 동원하여 비교적 쉽게 농촌지역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점이 있었고 일본은 전라남도 농촌 지역의 특징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라남도 종방 마을이 형성된 지역들은 뽕나무 재배에 적절한 기후 조건과 그 당시 광주에 설립된 제사 공장인 종연방직(鐘淵紡織)주식회사와 약림(若林) 제사 주식회사에 누에고치를 공급하기 매우 유리한 지역들(Jung, 1986)이라는 특징이 있었다. 소작양잠경영방식이 채택된 가난한 농촌지역들에는 대자본을 가진 일본의 기업들이 대규모의 뽕나무 재배 토지를 매입하고 이 토지에 잠실과 뽕나무 밭을 조성하고 여기에 투입되는 노동력은 이들 농촌지역들의 여성과 남성 노동력을 값싸게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1930년대 이후 소작양잠경영이 활성화 된 이유는 이 시기 한국에 진출했던 많은 일본 제사공장들에게 안정적인 누에고치를 공급해주기 위한 일본 정부의 노력으로 더욱 장려되었다.

가네보(鐘紡: 鐘淵紡績)는 일본 각지에 면사, 면포, 견사, 견포를 생산 가공하는 회사로 출발하여 중공업 분야까지 망라한 일본 굴지의 미쓰이 재벌 계열 회사로 이후에 섬유, 직물 가공을 하는 종연방직회사(鐘淵紡織會社)를 한국에 진출시킨다. 가네보는 1925년 서울에 명주실을 생산하는 제사 공장을 설립하고 이후 종방은 1920년대에 전라남도 지역에서 목화 못지않게 누에고치가 대량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면서 전라남도의 풍부한 섬유 원료를 이용하기 위해 1930년에 현재 광주 광역시 학동 부근에 생사를 생산하는 광주제사공장을 설립한다. 그리고 1935년 면제품 생산을 위해서는 광주 임동 근처에 종연방적 전남공장을 함께 운영하면서 전라남도 인근 지역의 목화와 누에고치에 대한 대규모 식민지 약탈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Park, 1994). 1930년대 광주시 임동 인구의 70%가 종방 공장의 노동자들이었으며 이런 이유로 일제 강점기 임동을 ‘종방촌’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Gwangju Folk Museum, 2009). 면화 이외에도 일본은 학동 부근에 설립한 광주제사공장에 공급할 다량의 누에고치의 수급이 필요해졌고 이에 종방(鐘紡)은 전라남도 인근 농촌 7마을들을 선정하여 이곳에 대규모의 뽕밭재배 단지와 잠실을 조성하게 되고 이와 같은 목적으로 일본에 의해 조성된 뽕나무와 누에고치 생산 마을들을 종방마을(종연방직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2) 일제 강점기 곡성군, 담양군 종방 마을 견 생산방식의 변화

① 누에와 뽕나무 : 조선누에에서 왜누에로, 구지뽕나무에서 참뽕나무로

일제 강점기 이후 곡성군 입면 종방 마을에서는 일제 강점기 이전 전통적으로 키우던 누에와 뽕나무 품종에 변화가 있었다. 조**(91세)는 곡성군 입면 종방 마을 최고령자 할머니로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16살 때(1940년대) 곡성군 입면으로 시집을 오셨다. 입면 마을로 시집을 오셨을 당시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시집 온께 암껏도 없고 뽕나무만 있고 사람도 일곱 집만 살드만 여온게 뽕나무 밭에 가서 누에 키우고 뽕따다 먹이고 누에만 키웠는디. 옛날에 그 양반 이름이 유수종씨여, 그 분이 순천에서 오셨어. 그 양반이 어찌나 똑똑해가지고 마을 사람들이 주인어른 주인어른 그랬어. 이 땅을 전부 관리를 다 했어….”

담양군 대전면과 수북면 종방 마을에서도 곡성군과 유사하게 일제 강점기 이전 전통적으로 키우던 누에와 뽕나무 품종에 있어 일본에 의해 개량되고 보급된 누에와 참뽕이라고 하는 뽕나무 품종으로의 변화가 있었다. 곡성군 입면 옆 마을에 살았던 김**(98세, 담양군 내동마을)는 “종방 마을에서 누에 키웠제. 잠업실 지어갔고. 일본놈 시상일 때. 일본놈이 나와서 주임하고 여 인부들이 저그가 돈 벌어 먹였제. 여자들 누에 키워서 고치 따갔고 다 올렸제. 그래서 종방이 새로 생긴 마을이여. 나 시집 막 와서는 없었던 마을 이었제, 그전에는 구지뽕도 먹였는디 일본사람들 오고 참뽕 먹이지, 밭 없는 집은 참뽕은 구경도 못해. 먹고 살기 바쁜디 참뽕 심을 밭이 있긴 하긋어?” 김**(82세, 담양군 용면)은 종방 마을에서 뽕나무를 재배하고 마을에 있는 한국 인부들이 일하러 갔다고 했다. 종방 마을에는 큰 건물(잠실)이 있고 그 앞에 넓은 뽕밭이 있고 이 뽕잎을 저장 하는 뽕잎 창고가 있었다고 했다. 뽕잎의 관리는 매우 엄격하게 이루어졌으며 누에고치가 매우 민감하여 이슬을 먹은 뽕잎을 먹는 경우 누에품종이 떨어지기 때문에 뽕잎창고에 보관해서 이슬이 먹지 않도록 하였다고 했다. 뽕나무를 따는 남성 인부들은 종방 마을 인근 마을에서 데려왔는데 주로 남성들이 뽕밭에서 뽕을 따다가 수레로 뽕잎창고까지 가져다 주면 여성들이 뽕잎을 잠실에 있는 누에고치의 치아판 위에 올려주는 일을 하였다고 하였다.

② 종연방직의 곡성군, 담양군 종방 마을 양잠 소작의 특수성

곡성군과 담양군 마을 주민들의 면담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강점기 종방 마을로 조성된 마을들에서는 종연방직회사에 의해 대규모의 뽕나무 밭과 잠실 터가 매입되었다. 양잠 부지의 구성은 누에를 키우는 잠실과 잠실 누에의 먹이게 되는 뽕나무를 심은 대규모의 참뽕나무 밭이었다. 또한 이 종방 마을을 관리하기 위해 한국인 혹은 일본인 관리자가 이주해서 거주하였는데 곡성군 용면의 경우 월당 유수종(1897년 전남 순천 월등면 대평리 출생)은 1935년 입면 종방 마을 관리자로 이주해 왔었던 한국인이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그는 25세 미국 선교사가 운영하는 순천 매산 학교에 입학하여 수업을 하였고 27세 때에는 광주 도립원 잠종 제조소에서 연마한 기술을 바탕으로 장성 황룡과 화순군 능주면과 담양군 옥과 종방 마을을 거쳐 담양군 용면 마을에 관리자로 부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의 주된 책임은 종방 마을 인근 남성들과 여성들이 참뽕을 따고 이것을 잠업실 누에에게 먹이고 임금을 관리하였다고 한다. 곡성군 입면 인근의 내동마을 사람들은 입면 마을이 타지에서 일제가 조성한 잠업으로 돈을 벌기 위해 온 이주민들에 의해 형성되어 역사가 짧은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근본 없는 마을’이라고 비하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하는 점은 종연방직의 곡성군, 담양군 종방 마을에 적용한 양잠 소작의 특수성이다. 일본이 종연방직공장을 설립한 지역이 비단 광주만은 아니었으며 앞서 설명한 바 와 같이 일본 독점제사자본의 하나인 종연방직공장과 같은 유형은 일본 양점 정책 중에서도 소작양잠경영방식에 속하는 것이었다. 다른 지역에 설립된 종연방직공장들과 한국의 각 지역에서 강제되었던 일제 강점기 소작양잠경영방식에도 동일한 방식이 아닌 지역적 차이가 존재하였다. 예를 들어 일본 제사독점자본가들은 경기도는“양잠모범지구”와 충청북도의 경우에는“잠업공동경영”의 방식의 소작관계를 맺게 되었다. 경기도의 양잠모범지구는 제사자본이 경기도 농촌 마을들에 뽕나무를 재배하는 상전(桑田)을 빌리고 임대료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선출자(先出資)를 한다. 그 다음으로 이 상전을 경영하여 양잠을 하는 농가 호수를 지정하며 제사자본가와 양잠 농가들 사이에 소작 계약(Kim, 1989)이 이루어지고 이 소작 계약 조건에 따라 제사자본가와 양잠농가들 사이의 수익을 나누는 방식을 정하게 된다.

이에 비교해 곡성과 담양을 비롯한 종방 마을들과 광주 종연방직회사가 맺은 관계는 소작양잠경영방식이 이루어졌던 앞의 지역들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였다. 즉 곡성군과 담양군 종방 마을은 일제 강점기(1930년대) 광주 종연(가네보) 방직공장에서 직영으로 운영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전라남도 종방 마을들의 경우 종연방직회사가 양잠 종 구입, 종방 마을들 내의 뽕나무 밭 매입, 잠실의 설치, 지도원 배치 등 기타 운영비용 전체를 부담한다. 그리고 다른 지역처럼 양잠 농가들을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종연방직회사가 운영하는 잠실과 뽕나무 밭에 인근 종방 마을의 주민들의 노동력을 동원하고 동원된 노동력에 대해 값싼 임금을 지불하는 방식이 적용되었다. 따라서 곡성과 담양 종방 마을의 남성들의 경우 매일 뽕나무를 채취하고 여성들은 이 뽕나무를 잠실의 누에에게 먹이는 일을 하였으며 날마다 조금의 일당을 받는 방식이었다. 곡성군과 담양군 인근 마을 주민들이 종방 마을에 가서 누에치는 일을 하고 받는 임금은 임**(91세, 담양군 수북면)의 사례에서 나타난다. 종방 마을(궁산1구)에 일을 하러 가서 남성들이 뽕나무를 따서 주면 여성들이 잠실 안에 있는 누에에게 뽕나무를 주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이와 같은 노동을 하고 받은 것은 하루 단위로 계산된 품삯으로 그것은 많지 않았고 용돈 수준의 적은 돈이라고 표현하였을 만큼 매우 낮은 수준의 것이었다. 그래서 박*(87세, 담양군 용면)은 인근 마을에서 종방으로 가서 일하러 가는 사람들은 적은 돈이라도 벌어야 했던 논이나 밭이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③ 견직물 제직과 재봉틀의 등장

종방 마을 이외에 각 마을의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누에를 치기 위해서는 면사무소에서 일본이 보급한 누에 종자를 구매해야 했다. 국**(83세, 담양군 수북면)과 김**(95세, 담양군 용면)은 전라북도 순창군이 친정으로 19세(1941년)에 혼인하여 담양군 용면으로 이주해왔으며 집에서 필요한 누에를 키우기 위해서는 그 당시 담양군 용면 사무소에서 누에알을 개인적으로 구매해야했다고 말했다. 누에종자는 전통적인 조선누에가 아닌 일본인들이 가져온 왜누에 종자였으며 마을 주민들은 “면에서 한깍쟁이, 두깍쟁이 누에알을 가져와서 누에를 키웠다”라고 표현했다. 일제 강점기 누에고치 알은 면사무소에서 판매하는 일본품종의 누에를 사다가 집에서 키우고 실을 만들어 직조하였다. 품질이 좋은 견직물은 그 당시 곡성군과 담양군 5일장의 베전에 가서 팔고 남은 것은 명절 때 외출복으로 옷을 해 입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일제 강점기 이후 곡성군과 담양군 일반 가정에서 누에고치를 키워 견직물을 직조하여 판매를 하거나 의례적인 용도로 귀하게 사용하였지만 종방 마을에 가서 잠실일을 하는 경우 거의 자신의 집에서 누에고치를 키우는 일은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곡성군과 담양군 종방 마을 마을들은 잠업 단지 형성 이후에는 견직물 생산이 누에고치 생산으로 단일화 되는 경향성을 보였다.

이 당시 이 지역들의 의복 만들기의 특이점은 재봉틀의 보급과 “틀쟁이”라고 표현되는 재봉틀을 소유한 옷을 제작해주는 사람의 존재였다. 장**(91세, 곡성군 목사동면)은 “옷 같은 거는 인자 베 같은 거해서 다독거려서 맨들어가꼬 우리는 인자 틀기술자 집에 가따줬어. 동네에 한 명씩 있었어. 틀기술자가 만들어 준 놈은 돈 주고 옷 해 입고 저고리, 바지 같은 거 만들어 주믄 돈 대신에 일도 해주고 그러고 했지” 라는 면담을 한 이후 곡성군 목사동면의 틀 기술자 할머니를 찾게 되었다. 한**(88세, 곡성군 목사동면) 할머니가 그 당시 틀 기술자로 자신이 재봉틀을 가지고 있어서 마을에서 틀이 있어 옷을 만들어주던 기술자였다고 했다. 일제 강점기에 농촌 지역에 재봉틀이 보급되면서 집에서 직접 바느질 하여 옷을 제작하는 방식에서 재봉틀 집에 맡기는 방식으로 옮아가는 과도기적인 과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④ 견 유통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에서 면화와 누에고치를 판매할 때 새롭게 등장한 방식이 “공동판매제(공판제)”방식이다. 이것은 일본 식민당국이 일본인 제사자본가들에게 고치를 저가에 다량 확보해주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농촌의 농민들이 생산한 양잠을 일제 강점기 이전처럼 자유롭게 시장에 판매하는 방식을 금지하고 공동판매제의 방식(Jung, 1986)을 실시하게 된다. 이 공동판매제 방식에서 누에고치 가격은 일본의 생사시세를 기준으로 일본 당국이 책정한 저가의 가격에 농민들의 양잠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것으로 공판제는 양잠 생산 농민들에게는 적절한 양잠 가격을 보장받을 수 없는 불합리한 판매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일본 제사 자본가들은 낮은 가격에 품질 좋은 양잠을 대량으로 수급받을 수 있는 역할을 해 주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담양읍 반룡리, 창평면 창평리, 대전면 대치리에 잠견공판장이 있었으며, 담양읍 양각리에 건견장, 담양읍 지침리와 대전면 대치리에 부잠사처리공장(등외견, 옥견, 하견등)이 있었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농촌지역을 포함한 한국 다른 농촌지역의 면화와 누에고치를 수매하는 방식에는 동일하게 공동판매제 방식(Choi, 2013)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소유의 종연방직회사가 자본을 들여 대규모로 조성한 종방 마을의 견 유통에 관해 조**(91세, 곡성군 입면)는 “누에고치는 광주 지사공장으로 많이 가져갔어. 양복이고 머시고 만들라믄 다 명주실로 만들잖아”라고 했고 한**(88세, 곡성군 목사동면)도 “누에고치 등수는 있제. 인자 질이 안 좋은 누에고치는 마을 사람들 집에서 사다 쓰라고 하고 질이 좋은 고치는 마을 사람들은 하나도 꼴도 못봐. 누에고치는 공장으로 가져가지. 공장 어디가 있어, 여그 지방은 광주로 많이 갔지”라고 했다. 이와 같은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종방 마을은 공동판매제의 형식도 아닌 종연방직과 종방 마을의 수의계약의 형식으로 담양군 용면 유수종과 같은 마을 관리자들이 누에가 고치를 만들어 내면 이 고치들을 일괄적으로 모아서 광주 종연 방직 공장으로 옮기는 방식이었다.

4. 해방 이후 곡성군, 담양군 종방 마을의 견 생산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남겨두었던 곡성군과 담양군 종방 마을의 상전과 잠실은 한국인에게 싼 값으로 불하되었다. 이후 6. 25전쟁이 일어나고 전쟁 이후 잠사업은 쇠퇴하였으나 전쟁 후 한국 정부의 근대화 노력이 시작되면서 연속적인 잠견증산계획이 추진되었다. 모든 종방 마을이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전통적인 견직물 생산 과정(양잠 → 제사 → 직조)에서 오직 뽕나무 재배와 누에고치만을 생산하는 잠업 생산체계로 전환하게 된 방식이 전쟁 이후 한국 정부의 잠업 증산 계획 추진 시기까지 동일하게 지속되었다.

전쟁 이후 한국 정부의 잠업 증산 계획은 장기 잠업 증산 계획이 수립되어 2회(1차(1962년-1966년), 2차(1967년-1972년)에 걸쳐 1970년대 초반까지 추진(Kim, 1970)되었으며 곡성군과 담양군 종방 마을들에도 이와 같은 정부 정책의 영향력(Table 2, 3 참조)이 미치게 되었음을 이 시기의 이 지역들의 양잠 생산량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Table 2, 3과 같이 곡성군과 담양군 전체의 잠업 생산량의 증감과 정부에서 추진한 잠업 증산 정책이 추진된 이후의 생산량의 증가와 어느 정도 연관성이 파악되고 있다. 곡성군과 양잠 통계자료의 경우 1975년 이전 자료 그리고 담양군의 경우에도 1970년대 전·후 통계자료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파악 가능한 두 지역의 통계자료를 비교해보면 Table 2 곡성군 통계자료는 1970년대 1975과 1976년에 양잠 증가세를 보이고 Table 3 담양군 통계자료에서는 1975년대 그 이전 시기보다 양잠농가, 상전면적, 공판량 등이 급격히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Sericulture Statistics in Gokseong-gun (Gokseong-gun Institute, 1982)

Sericulture Statistics in Damyang-gun (Damyang-gun Institute, 1994)

곡성군 목사동면과 입면은 전쟁 이후 행정체제를 개편하고 더욱 많은 이주민들이 정책을 하게 되었으며 특히 곡성군 입면의 경우 1967년부터 1970년대까지 섬진강 주변의 황무지인 땅을 경지 정리하여 정부로부터 분할을 받아 논, 밭을 확충하고 쌀농사와 함께 양잠 밭도 조성하게 된다. 곡성군 입면의 현재 젊은 이장님인 최**(48세, 담양군 입면)는 “전쟁 끝나고 종방 마을과 내동 마을을 비교했을 때 옛날 종방 마을은 근본 없고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마을이라고 해서 무시했지만 지금은 많은 부농층이 살고 있는 마을이 되었다.”라고 한 것처럼 일제 강점기 일본에 의해 특수하게 만들어졌던 입면에 많은 이주민들이 마을에 정착을 하기 시작하면서 논농사와 양잠을 비롯한 환금 작물 재배를 하면서 부유한 농촌으로 전환되게 되었다. 담양군의 김**(82세, 담양군 용면)는 해방 이후에 일본인들이 마을을 떠난 이후에 종방 마을을 한국인이 인수하였으며 마을의 각 가정에서도 과거와 같이 다시 양잠을 하기 시작하였다고 했다. 전쟁 이후에는 과거처럼 공판하지 않고 집에서 생산한 누에고치는 5일 시장에서 판매하였다고 했다.

1960년대 세계 수출 시장 호황과 정부의 잠업 부흥 정책으로 성장을 보였던 한국 농촌 잠업은 세계 유가 파동, 각국의 수입 규제 등 국내외 여건 악화로 1980년대부터 양잠 생산이 감소(Joung, 1990)하게 된다. 곡성군과 담양군의 경우도 1990년대 초반부터는 잠업의 급격한 감소세를 보이고 각 지역들은 잠업이 아닌 소득이 더욱 보장되는 시설원예작물과 같은 환금 작물 재배로 전환을 하기 시작한다. 조사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1990년대 이후로 곡성군 종방 마을의 경우 양잠 및 섬유 작물과 관련된 활동은 통계자료에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현재는 논농사를 통해 많은 수입을 얻고 있으며 이외에 사과, 감, 복분자 재배를 통해 부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담양군의 경우도 조**(93세, 담양군 수북면)는 면화나 양잠이 돈이 되지 않자 담양군 마을 전체가 대부분 대나무 문발을 짜기 시작했고 대나무로 판매로 수입이 늘게 되자 섬유작물 재배는 모두 그만두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한**(82세, 담양군 용면)는 영산강의 댐 막고 논농사가 돈이 되면서부터 그리고 시장에 나일론 옷감이 많이 나와서 사다가 옷을 해 입으면서 섬유 관련 생산은 그만 두었다고 했다. 한**(85세, 담양군 수북면)는 담양장에서 1950년대 이후 누에고치만을 팔았다고 하였다. 대나무 시작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시작해서 박정희 정권시기에는 대나무가 돈이 되었다고 했으며 전두환 정권부터 대나무 시세가 낮아져서 그만 두었다고 하였다. 이때가 1980년대 전, 후로 플라스틱(plastic) 바구니가 나와서 더욱 대나무 짜기를 그만두게 되었다고 하였고 그 이후 논농사를 짓고 밖으로 일하러 다녔다고 하였다.

결론 및 제언

본 연구는 일제 강점기 동안 전라남도 지역의 섬유 자원 수탈 대상으로서 면직물 이외에도 견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식민 정책에 의해 전라남도 지역에 7개의 양잠 재배 마을인 종방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들 종방 마을은 근대시기 전라남도 지역이 일제 강점기의 식민 정책에 의해 견직물 생산 문화에 있어 어떤 특징과 변화를 경험했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연구 대상 지역들이다. 본 연구는 전라남도 7개 종방 마을들 중 일차적으로 2개 마을(곡성군과 담양군)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 견직물 문화의 특징과 변화를 살펴보았다. 연구의 주요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강점기 이전 두 마을들에서는 전통 누에 품종인 조선누에와 구지뽕 나무가 이용되었다. 견 제사에서는 누에고치를 따뜻한 물에 풀어 실 끝을 찾아 물레로 감아올려 견사를 만드는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견 제직은 곡성군과 담양군 거의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전통적인 한국의 재래베틀인(腰機) “조선베틀”을 사용했다. 완성된 견직물은 그 당시 석곡장이나 담양 한재 5일장의 베전에 자유롭게 판매하였다.

둘째, 일제 강점기 이후 곡성군과 담양군 종방 마을의 누에와 뽕나무 품종은 한국의 다른 농촌 지역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한국 잠종(蠶種)과 구지뽕나무에서 일본의 개량 잠종과 뽕나무로 통일된다. 또한 면화와 양잠 섬유 원료를 한국 농촌에서 수탈하여 일본으로 반출하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국의 각 지역 농촌 지역들의 현지 상황에 따라 정책을 달리 적용하였다. 특히 곡성과 담양을 비롯한 종방 마을들과 광주 종연 방직회사가 맺은 관계는 소작양잠경영방식이 이루어졌던 한국의 다른 지역들과는 그 성격을 달리하였다.

셋째, 소작양잠경영방식이 전라남도 지역에 적용되면서 일본의 종연방직회사(鐘淵紡織會社)가 한국에 등장하게 되고 전라남도에도 광주에 제사공장이 설립되게 된다. 이와 동시에 공장 운영에 필요한 누에고치를 공급받기 위해 전라남도 인근 지역의 농촌 7개 마을들을 선정하여 “종방마을”이라 이름 짓고 이 지역들에 대규모의 뽕밭재배 단지와 잠실을 조성하게 되었다. 곡성군과 담양군 종방 마을 마을들은 잠업 단지 형성 이후에는 견직물 생산이 원료생산에서 직조까지 이어지는 방식에서 누에고치 생산으로만 단일화 되는 경향성을 보였다.

넷째, 일제 강점기 종방 농촌 지역에 재봉틀이 보급되었으며 이 시기는 전라남도 농촌지역에서 집에서 직접 바느질 하여 옷을 제작하는 방식에서 재봉틀 집에 맡기는 방식으로 옮아가는 과도기적인 과정이 전개되었다.

다섯째, 견 유통에 있어서 전라남도 종방 마을의 경우에는 공동판매제의 형식도 아닌 종연방직과 종방 마을의 수의계약의 형식으로 인근 종방 마을의 누에고치가 담양군 집산장에서 일괄적으로 모아서 광주 종연 방직 공장으로 옮기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특이점이 있었다.

여섯째,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남겨두었던 곡성군과 담양군 종방 마을의 상전과 잠실은 한국인에게 싼 값으로 불하되었다. 이후 6. 25전쟁이 일어나고 전쟁 이후 잠사업은 쇠퇴하였으나 전쟁 후 한국 정부의 근대화 노력이 시작되면서 연속적인 잠견증산계획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198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한국 양잠 생산이 급속히 감소하게 된다. 곡성군과 담양군의 경우도 1990년대 초반부터는 잠업의 급격한 감소세를 보이고 각 지역들은 잠업이 아닌 소득이 더욱 보장되는 시설원 예작물과 같은 환금 작물 재배로 전환을 하였으며 1990년대 이후로 곡성군 종방 마을의 경우 양잠 및 섬유 작물과 관련된 활동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본 연구는 이후 장성, 영광, 함평, 나주, 화순 등 전라남도의 5개 다른 종방 마을들의 견직물 문화에 관한 연구를 지속시키기 위한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본 연구 결과는 현재까지 다른 연구에서 하지 않았던 근대시기 전라남도 견직물 문화의 특징과 변화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되며 다른 종방 마을들과의 비교 연구의 기초 자료가 될 것으로도 생각된다.

Notes

The author declares no conflicts of interest with respect to their authorship or the publication of this article.

Acknowledgements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Ministry of Education of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NRF-2015S1A5B5A07042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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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Figure 1.

Map of south Jeolla province

Figure 2.

“Chiapan” in Moksadong-myeon, Gokseong-gun.

Figure 3.

Seokgok-market in Gokseong-gun.

Table 1.

Jeongbang Village in South Jeolla Province

Village Sub-village
Gokseong Moksadong-myeon, Ip-myeon
Damyang Daejeon-myeon, Subuk-myeon, Yong-myeon
Jangseong Nam-myeon, Buki-myeon, Samsae-myeon, Jinwon-myeon, Hwangnyong-myeon
Yeonggwang Yeonggwang-myeon
Hampyeong Walya-myeon, Nasan-myeon
Naju Noan-myeon, Seji-myeon
Hwasun Neungju-myeon, Dogok-myeon, lyang-myeon, Chunyang-myeon

Table 2.

Sericulture Statistics in Gokseong-gun (Gokseong-gun Institute, 1982)

Years Silkworms Mulberry area (ha) Silkworms (box) Outputs (kg)
1975 4,737 807.8 10,283 264,746
1976 4,579 796.5 10,953 338,648
1977 3,690 569.3 7,155 216,249
1978 2,785 382.4 7,105 194,940
1979 2,648 329.7 5,628 167,660

Table 3.

Sericulture Statistics in Damyang-gun (Damyang-gun Institute, 1994)

Years Silkworms Mulberry area (ha) Silkworms (box) Outputs (kg)
1965 640 97.9 773 13,803
· · · · ·
1975 1,448 385.1 5,260 194,195
· · · · ·
1980 697 135.2 1,732 55,819
1985 384 87 635 22,500
1992 58 23.7 211 4,987

Table 4.

Key Informants List

Name Sex Age Adderss
Kim** W 98 Gokseong-gun Moksadong-myeon
Kim** W 92 Gokseong-gun Moksadong-myeon
Kim** W 71 Gokseong-gun Moksadong-myeon
Jang** W 91 Gokseong-gun Moksadong-myeon
Lee** W 91 Gokseong-gun Moksadong-myeon
Han** W 88 Gokseong-gun Moksadong-myeon
Yoon** W 81 Gokseong-gun Moksadong-myeon
Choi** W 84 Gokseong-gun Moksadong-myeon
Kim** W 98 Gokseong-gun Ip-myeon
Cho** W 91 Gokseong-gun Ip-myeon
Jung** W 81 Gokseong-gun Ip-myeon
Choi** M 48 Gokseong-gun Ip-myeon
Kim** W 95 Damyang-gun Yong-myeon
Kim** W 82 Damyang-gun Yong-myeon
Han** W 78 Damyang-gun Yong-myeon
Han** W 82 Damyang-gun Yong-myeon
Park* W 87 Damyang-gun Yong-myeon
Lim** W 91 Damyang-gun Subuk-myeon
Han** W 85 Damyang-gun Subuk-myeon
Kook** W 83 Damyang-gun Subuk-myeon
Cho* W 93 Damyang-gun Subuk-myeon
Kwon** W 80 Damyang-gun Daejeon-myeon